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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리/바람 - 생각

§눈맞춤실험 The world's biggest eye contact experiment

실험의 인상은 이거였다. DSLR은 정말, 사람을 집중해서 잡아주는구나.

항상 그 사진들을 보며 너무 현실적이어 보여서 오히려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내가 사람을 정말 주의깊게 바라보면 정말로 딱 그렇게 보인다. 나는 오늘 마치 인터넷에 올라온 사람들의 화질 좋은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이 실험에서 깨달은 것은 크게 말해 하나이다.


<나는 주변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굉장히 매정해 보인다. 내가 다른 사람 눈치를 많이 본다고 생각하던 것을 생각하면.. 더 이상하다. 하지만 맞는 말 같다. 왜냐면, 나는, 

1.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얼굴, 이름, 신상). 2. 연락을 귀찮아한다. 3. 배려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남자친구와, 중학교 친구에게). 4.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캐치하지 못한다.


엄마는 사람의 얼굴을 특징별로 집어서 기억하는데 반해, 나는 적당한 인상으로 기억한다(그래서 자주 틀린다).

눈치를 자주 본다고는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고 마음을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그 사람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 상상하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실제와는 거리가 있다.


실험이 끝나고 길을 걷는데 사람들의 얼굴이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평소에는 보지도 않고 지나쳤을 것 같은데, 오늘은 하나하나 얼굴을 보며 그 특징을 관찰했다. 자주 보면 얼굴도 구분하고 기억할 수 있을까.


앞으로는 친구와 같이 있을 때 그에게 집중할 거다. 거리를 걸을 때 내 생각이나 핸드폰에 빠져 걷기보다는 사람들을 구경할 거다. 바에서, 카페에서 사람 구경에 나설 것이다.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걸 알았어. 한참 얼굴만 보고, 눈만 보고 있어도, 굳이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게 아니라도 내 생각에, 다른 생각에, 그리고 그 생각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던걸. 지나가다가 카페에 뜬금없이 앉아 손 붙들고 눈만 뚫어져라 처다보는 퍼포먼스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재미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미친년 취급하고 욕하고 가버리겠지만 뭐 어때, 다시 볼 사람들도 아닌데. 같이 내 눈도 들여다봐줄 사람이 있지 않을까. 사실, 내가 들여보는 느낌보다는 들여다봐지는 느낌이 기분 좋았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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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관계향상프로그램이 생각난다. 거기에서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며 '어색함'을 즐기는 법을 연습했던 것이 생각난다. 나는 그 어색함을 즐기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어색함을 즐겼다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어색함이 없었다.

처음에는 물론 어색했지만, 하면 할수록 나는 그저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고, 애초에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인걸.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서로와 친하지 않아서, 공통 주제가 없어서,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래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는 것이 얼마나 나에게 안도감을 주던지.

그러다가 정말 궁금해서 묻는 대화들은 정말 재미있었다.


사람들의 반응도 정말 다양했다.

무표정에서 미소를 짓는 사람, 우는 사람, 처음부터 끝까지 체셔캣 고양이처럼 활짝 웃는 웃음을 유지한 채로 날 보던 여자, 그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계속 응시하던 남자. 대화 한 마디 나누지 않고 헤어진 사람. 처음부터 대화로 시작해 끝까지 대화를 멈추지 않던 남자. 페이스북 친구까지 신청한 사람.

그리고 내 얼굴 표정에 따라 앞 사람의 표정이 바뀌는 것도 정말 재미있었다.


바라보며 나는 나를 생각했다. 나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향적이야. 나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내 시신경에 비친 건 저 사람이지만 내 뉴런을 달리는 건 전혀 다른 생각들이었어. 내 앞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던지. 친구들과 볼 때의 나를 생각한다. 그 때도 이랬겠구나, 반성해 본다.


앞의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어떤 삶을 살지 상상해 본다.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그렇게 서로에게 호의를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이 삭막한 도시에서(사실 나에게는 그렇게 삭막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사람의 온기를 느껴보겠다고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인데도, 모두가 마냥 착하고 친절해 보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모두의 얼굴에는 충분히 méchant해질 수 있는 기미가 보였다. 그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것은 의자에 앉아 계셨던 아주머니셨다. 다른 상황에서.. 충분히... 못 되게 굴 것 같은 사람. 

게다가 그 가운데서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좋아하려고 노력했다 .이 이벤트의 취지상, 모두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눈을 바라보며 그들을 모두 좋아하게 되는 것이 아니었고, 그 때도 그닥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눈만 바라볼 때가 훨씬 나았던 사람과의 대화도 있었다. 모두를 사랑할 수는 없다. 런던에서 배운 걸 다시 배운다.  

표정에 따라 인상이 훅훅 바뀐 것도 신기했다. 가장 많이 느낀 것은 캐롤린. 조금은 딱딱하다고 느꼈던 그녀가 웃을 때 얼마나 친근해 보이고 장난기 많아 보이고 사교적이어 보이던지. 나의 미소는 어떻게 보일지 궁금해졌다. 

내가 사랑이 가득찬 사람처럼 느껴졌다. 중반부까지 갔을 때 나는 호의만을 가득 담아 상대를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더 따뜻한 사람이라고 느껴졌고, 나의 시선이 따뜻하다고 생각했고, 몽실몽실한 기분 좋은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을 학교에 돌아가서도 추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송윤이도 퀴디치를 추진했는데, 나라고 일회성 이벤트를 못 할게 뭐냐! 각자 원하는 거 가져오라고 하고 총장 잔디만 이용할 수 있는 허가만 받으면 되지 않을까.

그 사람에 대해 코멘트를 하면 더 좋을 것 같다. 나에게 어떤 생각을 했을 지 정말 궁금한데, 솔직히 말할 수도 없고. 내가 한다면 아마 나는 그런 제도도 추가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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